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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이탈리아

2018년 3월 이탈리아 여행 Day 7 (2) 사라진 역사의 도시 폼페이 (Pompeii)

by G-I Kim 2018. 6. 17.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폼페이(Pompeii)는 기원전 89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철저하게 로마화가 진행된 도시였으며, 로마의 상류계급이 별장을 건설했던 휴양지였습니다. 서기 79년 8월 24일 정오 무렵 폭발한 베수비어스 화산의 화산재에 묻혀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가 되었습니다. 1592년 운하 공사 중 폼페이의 위치가 알려지고 1748년에는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에서부터 발굴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초기 발굴은 약탈이나 다름이 없었고 1861년 이탈리아를 통일한 국왕 빅토르 에마뉴엘 2세는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를 발굴 대장으로 임명하고 조직적인 발굴이 시작되었습니다. 발굴조사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폼페이는 당시 로마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최적의 유적입니다. 화산 폭발로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도시는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 현재는 도시의 약 5분의 4가 모습을 드러낸 상태인데 이곳에서 많은 출토품들은 현재 나폴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 버스를 타고 가다가 폼페이 유적지 입구 남쪽에 호텔들과 기념품점, 식당 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내렸습니다. 여기서 폼페이 유적지 입구까지는 걸어가야 하는데 유적지 입구 바로 앞에 과일을 팔고 있는 가게가 하나 보입니다.  레몬들이 많이 보이는데 폼페이는 레몬 특산지입니다. 

 

 

 

 

▼ 폼페이 유적지의 입구를 통해 입장합니다. 여기서 비탈길을 따라 입장하는데 두 개의 문이 보입니다. 1862년에 발굴된 마리나 성문(Marine Gate)은 두 개의 아치형 통로로 이루어져 있는데, 왼쪽 통로는 보행자 전용이고, 오른쪽 통로는 동물과 탈 것 전용으로 구분됩니다. 성문 아래쪽을 보면 기원전 4세기부터 2세기경의 것으로 보이는 삼니움족이 건설한 성벽의 잔재가 남아있습니다. 폼페이는 이 문을 통해 바다와 연결되어 있었고  한 변이 약 2킬로미터에 이르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고대 폼페이에는 모두 8군데의 입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 돌이 깔린 좁은 길을 따라 폼페이 내부로 들어갑니다.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인해 화산재에 의해 지붕이나 벽채들이 많이 파손된 상태이지만 가옥구조는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습니다. 곳곳에 보강 공사를 해놓은 것이 보입니다. 돌길 가운데 사람들이 길을 건널 수 있도록 편편한 돌들을 놓은 것이 보입니다. 수레의 바퀴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돌들 상에 간격이 있습니다.

 

 

▼ 폼페이 서쪽에는 포럼이라 불리는 광장(1820년 발견)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신전과 시장, 시청 등이 모여 있었습니다. 조사를 통해 바로 이 지역이 폼페이의 종교·정치·경제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커다란 건물들은 다 무너져 버렸고 일부 잔해와 기둥들만 남아 있습니다. 포럼 주변에는 지붕이 있는 열주들이 있어 사람들이 햇볕이나 비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 포럼 북쪽에는 기원전 150년에 건설한 주피터 신전(Temple of Giove. Temple of Jupiter)의 잔해와 눈에 덮힌  베수비오 화산이 보입니다.

 

 

 

포럼 남쪽에는 페이 지방 관청(Municipal Offices in Pompeii)이 남아 있습니다. 중앙광장 남쪽에 거의 비슷한 크기의 세 개의 건물이 나란히 위치하는데 서기 62년 폼페이를 강타한 대지진 이후에 피해를 입은 예전 건물을 대신하여 새로 들어섰으나 장소와 기능은 동일했다고 합니다.  세 개의 건물 중에 서쪽 건물은 조영관의 사무실이고, 중앙의 건물은 지방 의회 의원들이 모임을 갖는 회의실, 동쪽 건물은 두오비리의 사무실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  주피터 신전 동쪽 라야누스 황제 기념문 (Arco di Traiano)을 통해 북쪽으로 이동합니다. 주피터 신전 동쪽에는 기원전 120년전,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지어진 폼페이 시장(Macellum)의 유적의 외벽이 보입니다.  

 

 

▼ 폼페이의 도로는 모두 포장되어 있고 차도와 보도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넓은 도로와 좁은 골목길도 있고 상당 수의 유적들이 출입이 제한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 아직도 유적발굴을 하고 있습니다. 전설로 내려오던 폼페이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 작업은 1748년도에 이루어졌고 현재 발굴 작업은 거의 완료된 상태이지만 곳곳은 아직 작업 중에 있습니다. 아직 1/5은 발굴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 폼페이에도 유곽(Lupanare)이 있었습니다. 폼페이 중앙광장에서 동쪽으로 5분 거리에 스타비아 목욕탕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입니다. 건물에 면한 양쪽 길로 통하는 문이 하나씩 있는 크지 않은 2층 건물인데 안에는 작고 비좁은 방에 있는 석조 침대가 전부입니다. 벽에는 여러 남녀가 다양한 체위로 성관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선정적인 그림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건물의 위층은 옆길에 난 별도의 출입구를 통해 올라가게 되어 있고 용도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있지 않았습니다. 근처 건물의 외벽에는 뱀이 그려져 있는 벽화가 있습니다.

 

 

 

▼ 폼페이에서 발굴된 공중목욕탕은 세 군데가 있는데 Stabian baths, Forum baths, Central baths입니다. 폼페이 중앙광장 목욕탕이라고 하는 Forum baths는 로마 식민지 초기에 공공기금으로 건설되었으며 당시 두오비리였던 루키우스 카이시우스와 조영관 카이우스 옥키우스, 루키우스 니라이미우스가 작업을 지휘했습니다. 대형 아궁이가 있는 작업공간을 중심으로 동쪽은 남탕, 서쪽은 여탕으로 남탕은 화려한 인테리어를 가졌지만 여탕은 남탕에 비해 수수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내부로 들어가면 아포디테리움(탈의실), 삼면이 주랑으로 둘러싸여 있는 운동장, 프리기다리움(냉탕), 테피 다리 움(미온탕), 칼다리움(온탕)이 등이 있습니다. 비누 대신 오일을 온몸에 바르고 목욕을 했고 사우나는 청동화로에 석탄을 넣어 열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 비극시인의 저택 (House of the Tragic Poet)은 호머 저택(Homeric House) 또는 일리아스 저택(Iliadic House)이라고도 하는데 기원전 2세기의 전형적인 로마 시대 저택입니다. 건물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음에도 내부 장식이 다른 폼페이 저택들 중에서도 매우 풍부하고 수준이 높았습니다. 건물 곳곳에 그리스 신화의 장면을 표현한 복잡한 모자이크 바닥과 프레스코화가 장식되어 있는데, 특히 사슬에 묶인 개를 묘사하고 ‘개 조심(Cave canem)’이라고 새긴 모자이크 작품이 유명합니다. 

 

 

 

▼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인 사거리에서는 공동 수도와 각 가정으로 물을 보내기 위한 수도관 시설이 있습니다. 곳곳에서 남성의 성기를 나타내는 표식들을 볼 수 있는데 유곽의 위치를 가리킨다는 가정과 단순히 행운을 뜻하는 표식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폼페이에는 34개의 빵집이 있었는데 여러 대의 대형 제분기를 포함해 제분 시설과 제빵 시설을 모두 갖춘 규모 있는 빵집도 있었습니다. 이런 빵집들은 발굴 당시 벽돌을 쌓아 만든 대형 오븐에서 탄화된 둥근 빵이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발견된 빵은 윗부분이 부채꼴 형태로 8등분된 둥근 모양이었는데, 폼페이 벽화에 종종 등장하는 모습과 일치합니다. 이외에도 여러 화덕을 가지고 있는 식당들이 있는데 이 화덕에서 따뜻한 음식을 데워서 손님들에게 제공했습니다.

 

 

 

▼ 포럼 북서쪽에는 폼페이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하지만 폼페이의 유물은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에 마많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특히 희생된 폼페이 시민들의 리얼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석고들이 있습니다. 화산재로 뒤덮인 시체의 경우 이미 내부는 썩어 없어진 상태였고 그 안에 석고를 채워 넣고 위의 모양처럼 굳어지면 위의 화산재를 걷어 내러 시민들의 마지막 모습을 재현했습니다.

 

 

 

▼ 폼페이에는 세계에서 몰려든 많은 관광객들이 보입니다. 이 중 상당 수가 우리처럼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폼페이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습니다. 또한 기념 촬영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도 많이 보입니다.

 

 

 

▼ 시간 제약으로 가보지는 못했지만 폼페이에는 기원전 80년에 지은 2만명 수용 규모인 폼페이 원형경기장(Anfiteatro di Pompei), 기원전 3세기 말엽 움푹하게 들어간 지형을 개조해서 만든 5,000석 규모의 대극장 (Teatro Grande)과 주로 음악당으로 사용되었던 Odeon - Teatro Piccolo이 있습니다.  

 

 

 

 

▼ 폼페이 검투사 숙소 (Quadriporch)는 원래는 대극장을 찾는 관객들이 휴게 겸 만남의 장소로 만들어졌는데 서기 62년 대지진 이후에 검투사들의 임시숙소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넓은 공터를 중심으로 사면에 74개의 도리아식 기둥으로 이루어진 주랑이 있는데,  중앙의 넓은 공터는 검투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고 주랑 주변으로 검투사들이 묵는 좁은 방이 있는 구조입니다. 검투사들이 사용하는 청동 갑옷과 무기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 오후에 카프리섬을 가야 하기 때문에 폼페이 유적지를 대충 둘러보고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유적지 남쪽을 통해 식당으로 이동합니다. 고고학적 장소들은 고대 세계의 사회·경제·종교·정치 생활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려주는 출처가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데 다음에 다시 폼페이를 방문하게 되면 미리 공부를 하고 와야 할 것 같습니다.

 

 

 

▼ 폼페이 유적을 둘러보다 보니 고대 그리스, 로마. 에트루리아의 유물 전문 박물관인 미국 캘리포니아의 퍼시픽 팰리세이즈에 있는 게티 발라(Getty villa) 가 생각납니다. 게티 발라의 건물들은 서기 79년 베수 비 오산의 대폭발로 30m 이상의 화산재에 매몰되었던 폼페이 유적과 헤르쿨라네움 유적에서 발굴된 주택을 본떠서 만들었습니다.

 

 

게티발라(Getty Villa), 고대 그리스, 로마. 에트루리아의 유물을 보다. 02

이제 게티빌라 건물의 가장 유명한 곳인 바깥쪽 페리스타일을 보러 박물관 건물에서 페리스타일로 나섭니다. 가운데 길게 놓여진 연못(?) 이 아주 인상적입니다...주변에 벤치도 있고 청동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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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폼페이 관광 후 폼페이의 식당 Ristorante Vesuvio Pizzeria에서의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단체손님들이 유난히 많았던 이 식당에서는 커다란 치즈와 토마토, 올리브유로 만들어진 샐러드와 리조또를 먹으면서 악사의 현지 음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이 식당 이외에는 눈에 띄는 식당이 거의 없더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