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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영국, 아일랜드

영국, 아일랜드 여행 9일, 영국, 아일랜드 여행 9일, 영국박물관(대영박물관, The British Museum)-3, Middle East (Room 6-10)

by G-I Kim 2021. 10. 12.

▣ 우리나라에서 대영박물관이라고 불리는 영국박물관(The British Museum)은 영국 런던에 1759년 설립된,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립 박물관입니다. 인류의 태동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세계 각 문명권의 역사 문화를 망라하는 800만 점 이상의 유물과 민속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Assyrian Sculpture and Balawat Gates (Room 6)>

 

▲ 화가 나서 포효하는 거대한 사자상(Colossal Statue of a Lion)은 아슈르나시르팔 2세 (Ashurnasirpal II, 기원전 883-859년 재위)의 궁전에 인접한 여신 이슈타르(Ishtar)에게 바쳐진 작은 신전의 입구에 있던 한 쌍의 사자 중에 하나입니다. 이슈타르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미와 연애, 풍요와 다산, 전쟁, 금성의 여신입니다. 이 사원은 1849년 헨리 리야드(Henry Layard)에 의해 발굴되었습니다. 사자의 형상을 사원이나 도시의 문 옆에 두는 것은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관습이었으며 실제 사자들은 그 지역에서 흔해서 19세기까지 그곳에서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사자상의 높이는 2.59미터, 길이는 2.24미터, 다리는 5개이며 쐐기문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자상의 나머지 하나는 이라크 현지에 남아 있다가 모술 박물관으로 옮겨졌는데 2015년 지하드 무장단체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Stela of Ashurnasirpal II, British Museum, London, October 2019

▲ 아슈르나시르팔 2세 Ashurnasirpal II)의  석비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세워진 거대한 아시리아 비석입니다. 기원전 883년에서 859년 사이에 만들어진 이 조각상은 1850년 영국 고고학자 오스틴 헨리 레이아드(Austen Henry Layard)에 의해 칼후(Kalhu) 고대 유적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발견 다음 해에 런던으로 운송되었고 웨일스 왕자에 의해 박물관으로 선물로 보내졌습니다. 무게가 4톤이 넘고 높이가 3미터인 이 조각상은 아시리아 왕이 다섯 신을 숭배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 샬마네세르 3세의 검은 오벨리스크(Black Obelisk of Shalmaneser III)는 비문에 많은 장면들이 있는 검은 석회암 아시리아 조각상입니다. 그것은 북부 이라크의 님루드(고대 칼후)에서 유래되었고 샬마네세르 3세 (기원전 858-824년 재위)의 업적을 기념합니다. 아직 발견된 두 개의 완전한 아시리아 오벨리스크 중 하나이며 설형문자로 명문이 새겨져 있고 성서 인물인 이스라엘의 왕 예후(Jehu, 기원전 842년~815년)의 가장 초기의 고대 묘사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몇몇 다른 박물관들은 복제품을 제작했습니다.

 

▲ 발라왓 문(Balawat Gates)의 복제품과  아시리아 신화에 나오는 수호신 라마수(Lamassu)의 거대한 동상 한쌍이 있습니다. 발라왓 문은 아슈르나시르팔 2세 (Ashurnasirpal II, 기원전 883–859년)와 샬마네세르 3세 (Shalmaneser III, 기원전 859–824년) 시대의 발라왓의 몇몇 건물들의 주요 문을 장식했던 3개 세트로 된 문입니다.  라마수(Lamassu)는 님루드에 있는 아슈르나시르팔 2세 (기원전 883–859년) 왕궁 입구에 있었습니다. 사람 머리에 뿔이 달린 관을 쓰고 사자의 몸에 한 쌍의 거대한 새 날개와 다섯 개의 다리를 가졌습니다.  

 

▲ 라마수(Lamassu)는 알라들람무(Aladlammu)라고도 불리는 아시리아 신화에 나오는 수호신입니다. 상상 속의 동물로 일반적으로 한 쌍의 라마수 조각상이 궁궐 입구나 도시의 성문에 서 있으며 그 크기는 하나같이 거대합니다. 라마수 조각상은 사람 머리에 뿔이 달린 관을 쓰고, 황소나 사자의 몸에 한 쌍의 거대한 독수리의 날개를 가졌습니다.  라마수의 사람 머리는 지혜를 의미하고, 황소나 사자의 몸은 힘을 상징하며, 독수리의 날개는 민첩함을 나타내는데 뿔이 달린 관은 신성을 드러낸다고 알려졌습니다.

 

Balawat Gates, British Museum, London, October 2019

▲ 발라왓 문에는 아시리아 왕들의 업적을 묘사한 광범한 서술이 있어  아시리아 궁전의 부조에 필적하는 신아시리아 제국의 가장 중요한 현존하는 예술 작품들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원전 614-612년에 신아시리아 제국이 멸망했을 때, 발라왓은 파괴 되었습니다. 발라왓 발굴 당시 성문의 삼나무로 만들어진 목제 부분은 부패되어 사라졌으며 청동 띠만 남아있었습니다. 현재 박물관에 완전한 모습으로 보이는 문은 재건된 것으로 발라왓 문의 높이는 6.8미터로 추정되며 8개의 청동 밴드가 설치되었습니다.

 

Balawat Gates, British Museum, London, October 2019

▲ 거대한 발라왓 문 옆에는 청동 띠 원본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밴드에는 샬마네세르 3세가 기원전 852년 티그리스 강의 수원을 발견한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강은 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Assyria: Nimrud (Rooms 7–8)>

 

▲ 신아시리아(Neo-Assyrian)의 왕 아슈르나시르팔 2세 (Ashurnasirpal II, 기원전 883~859년)는 님루드(Nimrud)에 그의 웅장한 북서쪽 궁전(North-West Palace of Ashurnasirpal II)을 지었습니다. 님루드는 오늘날 이라크의 티그리스 강에 위치해 있습니다. 궁궐의 내부에는 조각된 석판들로 장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Room 7, 8에 전시된 세부 부조들은 원래 궁궐의 왕좌실과 다른 왕실 아파트에 있었는데 왕과 신하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를 가진 반인반수와 아슈르나시르팔 2세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아슈르나시르팔 2세가 군사 작전을 하는 모습이나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왕실 스포츠인 사냥에 참여하는 장면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 위의 석판에는 아시리아의 군인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포로들을 끌고 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시리아는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잘 훈련된 강력한 군대, 조직화된 관료군, 완비된 역전 제도 등을 유지하였습니다. 또한 기병과 전차를 갖춘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시리아는 다른 민족들에 대한 우월의식이 강하다 보니 피지배민에 대한 정책이 상당히 강압적이거나 잔혹했다고 합니다. 아래 석판에는 아슈르나시르팔 2세가 그의 전차에 있는 사자를 사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실의 사자 사냥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매우 오래된 전통이었습니다.

 

▲ 님루드의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북서쪽 궁전에 있었던 라마수입니다. 한 쌍의 라마수 조각상은 서로 모양이 다른데 하나는 황소의 몸을 가졌으나 다른 하나는 사자의 몸을 보이고 있습니다.

 

▲ 님루드(Nimrud)는 고대에 칼라흐(Kalakh), 칼르흐(Kalkh)라고 불리던 이라크 북부 모술 남방 35 킬로미터, 티그리스강 동안에 위치한 아시리아의 수도유적입니다. 1845년부터 1963년까지 발굴하였습니다. 님루드는 기원전 13세기에 기초가 정해지고 기원전 9세기에 최성기를 맞았으며 기원전 612년에 공략되었습니다. 사다리꼴의 군사도시로 지구라트, 니누루다 신전, 이슈타르 신전,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북서 궁전, 샤르마네세르 3세의 중앙 궁전, 에사르하돈)의 서궁전, 샤르마네세르 요새 등이 건설되었습니다.

 

▲ 님루드의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북서쪽 궁전의 디지털 복원도입니다. 아시리아의 문화적 특색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문화를 융합하여 변경지대에 전한 것입니다. 또한 니네베와 코르사바드 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시계획이나 축성에 능하였고, 예술면에서는 석조의 환조와 부조로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전투와 맹수 사냥 등 잔인한 행위를 주제로 한 것이 많은데 역대의 왕들은 전승이나 사적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연대기도 편찬하였습니다.

 

<Assyria: Lion hunts, Siege of Lachish and Khorsabad (Room 10)>

 

<Assyria: Lion hunts>

 

▲ 고대 아시리아에서 사자를 사냥하는 것은 왕의 스포츠로 여겨졌는데 이것은 그의 백성을 보호하고 싸워야 하는 지배 군주의 의무를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방 10A에 조각된 부조들은 마지막 위대한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기원전 668–631년)의 사냥 모습을 묘사하고 있으며 니네베(Nineveh)에 있는 센나헤리브의 남서쪽 궁전(South-West Palace of Sennacherib)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긴장과 사실감으로 가득한 사냥 장면은 아시리아 미술의 가장 훌륭한 업적 중 하나입니다. 사자의 석방, 뒤따르는 추격, 그리고 그 이후의 살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니네베의 궁전에는 모두 24개의 사자 사냥 장면이 있었습니다. 

 

▲부조들은 아슈르바니팔 왕의 공식화된 의식인 사냥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경기에서는 포획된 아시아 사자들이 우리에서 풀려나 왕이 화살, 창, 또는 칼로 도살하도록 했습니다. 이 작품들은 기원전 645~635년경에 만들어졌고 밝은 색상의 전체적인 장식의 일부를 차지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행사에 사용되었던 아시아 사자들은 때때로 행사를 위해 감금되어 길러졌다고 합니다

 

▲ 이 부조들은 1852~54년에 발굴되었고 1854~55년에 영국 박물관으로 보내졌습니다. 일반 대중들과 미술사학자들 모두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현실적인 사자들에 대한 표현은 항상 찬사를 받아왔습니다. 인간의 모습은 대부분 형식적인 포즈이지만 사자들은 매우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부조를 만든 아슈르바니팔은 아시리아의 마지막 대왕이었으며 그의 통치가 끝난 후 네오 아시리아 제국은 내전의 시대로 전락했습니다. 부조가 만들어지고 25년이 지난 612년이 되자 제국은 멸망했습니다.

 

<Assyria: Siege of Lachish>

 

▲라키시 부조(Lachish reliefs)들은 기원전 701년 라키시(Lachish) 공성전에서 아시리아가 유다 왕국에 승리를 거둔 이야기를 들려주는 조각품입니다. 기원전 700년에서 681년 사이에 니네베에 있는 센나헤리브의 남서쪽 궁전의 장식으로 조각된 이 부조는 발견 당시 넓이는 12미터, 길이는 5.10미터였습니다.

 

▲라키시 성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과 돌덩이를 막는 덮개 아래서 6개의 공성퇴를 설치하고 성곽을 공략하는 아시리아 군인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부조에는 라키시의 건축물과 라키시의 최종 항복, 공성전 모습, 공성전 기계와 군대들이 잘 묘사되어 있어 고고학적 발견과 함께 그 시대의 포위전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 기원전 701년 발생한 신아시리아 제국의 라키시 공성전은 레반트의 몇몇 왕국들은  아시리아 왕 센나헤리브에게 세금을 내는 것을 중단하면서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센나헤리브는 반란을 일으킨 왕국들, 그중에서도 유다 왕국을 다시 정복하기 위한 원정을 시작했습니다. 유다를 정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유다 성읍들 가운데서 둘째로 중요한 성읍이었던 라키시를 포위 공격하게 됩니다.  유대 수비대는 진격하는 아시리아인들에게 돌멩이를 던지고 화살을 쏘았습니다. 아시리아 군 공병들은 아시리아와 유대인 군대가 근접전을 벌이기 시작한 정문 동쪽에 돌과 흙을 라키시 성벽 높이까지 쌓아서 경사로를 건설했습니다. 또한 아시리아인들은 성벽을 무너뜨리고 공성전을 벌였습니다. 유대인 수비대는 아시리아 군대를 저지하지 못했고 일부는 도주하였습니다. 발굴 결과 인근 동굴 중 한 곳에서 약 1,500개의 두개골이 발견되었으며 경사로와 성벽 꼭대기에서는 수백 개의 화살촉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라키시 공성전의 부조를 3D 기법으로 촬영한 동영상입니다.

 

<Assyria: Khorsabad>

 

▲코르사바드(Khorsabad)는 고대에 두르 샤르루킨(Dur Sharrukin)이라고 불리던 곳으로 사르곤 2세(재위 기원전 721~705년)가  기원전 706년에 완성한 정사각형의 도시입니다. 코르사바 궁궐 입구에는 황소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라마수 한쌍이 있었습니다

 

▲ 코르사바드 궁궐 입구의 라마수를 자세히 보면 가운데 이음매가 있습니다. 이 석상을 영국으로 옮길때 4 등분해서 이동했기 때문입니다. 이 조각상들은 1850년에 박물관이 획득한 것입니다. 코르사바드는 1852년에 프랑스에 의해 다시  발굴이 되었으며 1855년에는 발굴될 유물들을 화물선과 4척의 뗏목으로 파리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1855년 5월 호송대가 바그다드를 떠났을 때 해적들의 습격 등으로 주요 화물선이 침몰하고 4척의 뗏목이 좌초되어 분실되어 200개가 넘는 상자 중 28개만이 결국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후 유실된 유물을 복구하려는 후속 조치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 이 석고판에는 사르곤 2세가 그의 아들이자 왕세자인 세나케리브(Sennacherib)로 추정되는 고위 관리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710~705년경의 작품으로 왕은 긴 지팡이를 들고 있습니다. 사르곤 2세(Sargon II)는 사르곤왕조의 시조로 전왕 샬마네세르 5세의 죽음에 편승하여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였습니다. 군사적으로 사마리아, 하마, 다마스쿠스, 아르메니아를 정복했으며 바빌론의 메로다크발라단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스스로 바빌론 왕이 되었습니다. 정복지의 백성을 제국의 변경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두르샤루킨에 거대한 궁전을 건설했고 소아시아의 수메르인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습니다. 왕위는 아들 세나케리브가 계승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