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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여행/베트남

베트남 북부 여행 2일 (4) 하노이 호찌민 박물관, 한기둥 사원

by G-I Kim 2021. 11. 2.

▣ 하노이의 호찌민 박물관(Bảo Tàng Hồ Chí Minh)은 바딘 광장 호찌민 묘소 남쪽에 위치한 베트남 정신적 지도자 호찌민의 베트남 혁명과 투쟁을 테마로 하는 박물관입니다. 소련이 건설을 원조했으며 1990년 5월 19일 호찌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관하였습니다. 이 박물관은 12,000 제곱미터(3,600 평) 면적에 호찌민의 유품과 애장품, 혁명의 역사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하노이의 호찌민 박물관(Bảo Tàng Hồ Chí Minh), 2017년 2월

하노이의 호찌민 박물관(Bảo Tàng Hồ Chí Minh)은 1985년 8월 31일 착공하여 1990년 5월 19일 호찌민 탄생 100주년 기념일에 완공했습니다. 박물관 건물은 대각선으로 배치된 비스듬한 사각형 블록으로 높이가 20 미터이고 각각의 길이는 70 미터입니다. 박물관은 전국적, 국제적으로 수집된 유물, 미니어처 그리고 다양한 선물을 모아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하노이의 호찌민 박물관(Bảo Tàng Hồ Chí Minh)의 호찌민 청동상과 백개의 알과 금룡, 2017년 2월

 호찌민 박물관 관람은 오프닝 부스에 설치되어 있는 높이 3미터  받침대 0.6미터 무게 3톤인 호찌민의 청동상에서 시작합니다. 베트남 국가 건설의 전통적 상징 "백개의 알과 금룡"의 이미지도 설치되어 있습니다.

 

하노이의 호찌민 박물관(Bảo Tàng Hồ Chí Minh)의 첫 번째 주제(1890-1910), 2017년 2월

 첫 번째 주제는 1890년부터 1910년까지 그의 성장, 고향과 청소년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호찌민은 1890년 베트남 응에안 성에 있는 호앙쭈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프랑스 식민지 치하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응우옌 왕조의 관리가 되었지만 자신의 일이 식민지 경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에 절망했고 결국 불복종을 이유로 해직됩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호찌민은 물론 형과 누나도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노이의 호찌민 박물관(Bảo Tàng Hồ Chí Minh)의 두 번째 주제(1911-1920), 2017년 2월
하노이의 호찌민 박물관(Bảo Tàng Hồ Chí Minh)의 두 번째 주제(1911-1920), 2017년 2월

두 번째 주제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식민지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전 세계를 여행한 이야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때 호찌민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접하게 됩니다. 전시물 한쪽에는 식민 통치자와 봉건 주의자들의 풍요로운 삶을 나타내고 다른 한쪽에는 서민들의 열악한 생활 여건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호찌민은 1911년 사이공에 있는 프랑스 해운회사에 수습 요리사로 취직하여 프랑스로 건너갔고 이후 영국, 미국 등 여러 나라를 돌면서 어러 직업을 거쳤고 특히 미국에서는 흑인 인권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으로 호찌민은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태국어, 스페인어, 독일어, 러시아어에도 능통했습니다. 1917년에 귀국 후 베르사유 회의에 참석해서 베트남인의 인권보장을 주장했습니다.

 

하노이의 호찌민 박물관(Bảo Tàng Hồ Chí Minh)의 세 번째 주제(1920-1924), 2017년 2월

세 번째 주제는 1920년부터 1924년까지 호찌민의 공산당 활동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920년 호찌민은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파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일본의 압제에 신음하던 한국에 깊은 관심을 두고 이에 대한 글을 신문에 투고하기도 했습니다. 1923년에 개최된 제2차 프랑스 공산당 대회에서는 참가단 주석이 되었고 소련으로 건너가 국제 공산당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네 번째 주제는 1924년부터 1930년까지의 호찌민의 활동으로 1924년 12월 중국 광저우로 가서 베트남 혁명동지회를 창립하고 소련으로 건너가 국제 레닌 학교에서 수학을 합니다. 1930년 홍콩에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당합니다. 다섯 번째 주제는 1930년부터 1945년까지의 활동으로 민족해방운동과 8월 혁명을 주도했습니다. 이때 장제스의 중화민국 군대에 잡혀 1년 동안 투옥생활도 했지만 미국과 친하게 지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미국은 프랑스와 소련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호찌민을 멀리하게 됩니다. 호찌민은 1945년 8월 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해 주석으로 선출되어 8월 25일 임시정부를 수립했습니다.

 

하노이의 호찌민 박물관(Bảo Tàng Hồ Chí Minh)의 여섯 번째 주제(1945-1954), 2017년 2월

여섯 번째 주제는 프랑스 침략과 미국의 개입에 맞서 싸우기 위한 투쟁을 한 1945년에서 1954년까지의 내용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베트남의 북쪽에는 중국의 국민당군이 남쪽에는 영국과 프랑스군이 진주했습니다. 호찌민은 중국을 경계하여 프랑스의 연방이 되려는 협상을 하였으나 성과가 없었고 미국도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1946년 11월 프랑스가 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을 무차별 포격하여 민간인 6,000명이 학살당하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생했습니다. 처음에는 미국이 지원하는 프랑스군이 우세했으나 1949년 중국은 통일한 중국 공산당이 베트민을 지원했고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승리를 계기로 프랑스의 식민 통치가 끝나고 베트남이 독립했습니다. 그리고 제네바 협약에 따라 1954년 베트남은 17도선을 기점으로 분단되었습니다.

 

하노이의 호찌민 박물관(Bảo Tàng Hồ Chí Minh)의 일곱 번째 주제(1954-1969), 2017년 2월

일곱 번째 주제는 북베트남의 독립 후 사회주의 혁명 활동과 미군과의 베트남전을 나타냅니다(1954년~1969년). 그의 사망과는 상관없이 베트남전은 그의 사후 3년간 지속되었고 1975년 북베트남의 승리로 베트남은 통일이 되었습니다.

 

하노이의 호찌민 박물관(Bảo Tàng Hồ Chí Minh), 2017년 2월

마지막으로 상징적인 베트남식 탑의 고대 건축 양식에 따라 민족 재료와 곡선 지붕으로 지어진 사원이 있습니다.

 

하노이의 호찌민 박물관(Bảo Tàng Hồ Chí Minh), 2017년 2월

호찌민 박물관도 관람을 마치면 마지막으로 기념품점이 있습니다. 호찌만의 사진들이 걸려있으며 호찌민의 관련 서적과 기념품뿐만 아니라 베트남 도자기도 판매하고 있습니다. 베트남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오래전부터 도자기를 만들어 왔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트남도 동남아에서 상당한 품질의 도자기를 만들었던 나라입니다. 베트남 도자기는 특히 동물의 모습을 형상화한 도자기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베트남은 기원후 1세기부터 시유 도자기를 생산했으며 15~16세기에는 도자기 중에서도 고가인 청화백자를 생산하여 다양한 국가에 수출까지 합니다.  하노이 근처에 밧짱(Bat Trang)이라는 도자기 마을이 있습니다. 이 곳은 12세기부터 중국 화남지역의 도자기 기술을 받아들여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하고 14세기에는 원나라 도자기를 굽다가 15세기부터는 안남 도기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까지 도자기를 수출했다고 합니다. 

 

호찌민 박물관 옆에는 베트남 국보 1호로 하나의 기둥 위에 사당을 얹은 구조는 연못 위에 핀 연꽃을 상징하는 못꼿 사원이 있습니다. 2017년 2월 

호찌민 박물관을 나오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베트남 국보 1호인 못꼿 사원(한 기둥 사원, Chùa Một Cột)을 방문한 사람들입니다. 호찌민 박물관 서쪽에 있는 디엔후 사원 입구로 들어서면 하나의 기둥 위에 사당을 얹은 구조의 못꼿 사원을 볼 수 있습니다.

 

못꼿 사원은 연못 한가운데 있는데 계단으로 땅과 이어져 있고 가파른 사다리를 오르면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2017년 2월

못꼿 사원(Chùa Một Cột)은 1049년에 지어진 고찰로 한 개의 기둥 위에 불당을 얹었다고 해서 한 기둥 사원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원래 연못 한가운데 있었지만 계단으로 땅과 이어져 있고 가파른 사다리를 오르면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사원의 창건자인 이왕조의 태종 리따이톤은 꿈속에서 연꽃 위에 아이를 안은 관음보살을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얻었는데 이후 관음보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연꽃 모양을 본떠 이 절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지인들에게는 아기를 점지해주는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못꼿 사원을 나와 다시 바딘 광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호찌민 관저를 보기 위해 모여있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단체 여행을 온 것 같습니다. 바딘 광장을 벋어나 기다리고 있던 버스를 타고 베트남 민족학 박물관으로 이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