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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여행/베트남

베트남 북부 여행 4일 (3) 하노이 호아로 감옥박물관(Hoa Lo Prison Museum)

by G-I Kim 2021. 12. 7.

● 호아로 감옥 박물관(Hoa Lo Prison Museum)은 베트남 하노이에 있었던 교도소와 포로수용소로 현재는 교도소로 사용하지 않고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19세기 말 프랑스 식민 정부가 프랑스 식민 통치에 대항하여 베트남의 독립을 외치던 베트남 사람들을 잡아 고문하던 장소였습니다. 북베트남이 공산화된 이후에 호아로 감옥은 공산혁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투옥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베트남 전쟁 동안 미군 포로를 수용하여 하노이 힐튼(Hanoi Hilton)이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교도소와 포로수용소로 사용되던 건물의 대부분은 하노이 타워를 지으면서 철거되었으며 남아 있는 건물을 현재 호아로 감옥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노이 호아로 감옥 박물관 입구, 2017년 2월

△ 호아로 감옥 박물관 앞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보이고 관광객이 타고 온 대형버스도 주차해 있습니다. 호아로 감옥은 1896년 프랑스 식민 정부가 지은 감옥으로 푸칸(Phu Khan) 지역에 위치합니다. 입장료는 30,000동(한화 1500원)입니다. 프랑스인들은 이곳을 <메종 센트랄(Maison Centrale)>이라 불렀으며 현재도 정문 입구에 이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프랑스는 이곳에 위험하고, 장기수들을 구금하도록 지정해두었는데 이 감옥은 하노이 프렌치 쿼터(French Quarter) 근처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호아로(Hỏa Lò)라는 이름은 흔히 ‘불붙은 용광로’을 의미하기도 하고 ‘화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곳의 명칭은 호아로 거리(phố Hỏa Lò)라는 거리명에서 유래했으며,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이 거리에서 ‘목재난로’와 ‘석탄 난로’를 판매하는 상점이 몰려 있어서 호아로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 감옥은 1886년~1889년부터 1898년~1901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인들에 의해 건설되었습니다.

 

호아로 감옥 박물관 입구 뒤로 보이는 하노이 타워, 2017년 2월

△ 호아로 감옥 박물관 입구 뒤로 하노이 타워가 보입니다. 호아로 감옥은 총면적 12,908 평방미터로 인도차이나에서 가장 크고 요새화 된 감옥 중 하나였는데 1993년 싱가포르 사업가들이 하노이 타워를 짓기 위해 감옥 대부분을 헐어 버렸습니다. 하노이 타워에는 서머셋 그랜드 하노이 서비스 레지던스 (Somerset Grand Hanoi Serviced Residences)라는 호텔이 있습니다. 이 호텔은 25층 건물로 195개의 객실과  레스토랑, 커피숍, 사우나, 실외 수영장, 피트니스 센터 등이 있는 4성급 호텔입니다. 객실마다 소파가 놓인 거실, 식사 공간과 각종 시설을 완비된 주방, 세탁 시설도 제공됩니다. 1997년에 개업하였으며 2010년에 리모델링을 하였습니다. 호텔 아래층에는  컨벤션 센터, 아동교육센터 그리고 쇼핑몰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 호아로 감옥은 현재 일부만 남아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도시 중심에 감옥을 배치한 것은 베트남의 프랑스 식민지 시대 초창기적 특성의 일부였습니다. 감옥은 두터운 노란색 돌로 지은 건물들 안에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감옥과 담장 사이에 공간이 넓지 않습니다. 191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거리의 행상들은 감옥 창문을 통해 외부 서신을 전달하고, 벽 너머로 담배와 아편을 던졌습니다. 또한 감방에서는 서신과 봉투를 반대 방향인 거리 쪽으로 던져 수용소 내에서는 의사소통과 생각들이 교환되었습니다. 1930년대와 1940년대 북베트남 내의 많은 공산주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이곳 메종 센트랄르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 호아로 감옥 박물관 입구로 들어가면 티켓을 받는 직원이 있고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부터 순서에 따라 박물관을 관람하게 됩니다.

 

호아로 감옥 박물관 안내도, 2017년 2월

△ 호아로 감옥 박물관의 안내도입니다. 이곳은 두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베트남 독립운동가를 수용한 호아로 수용소 구역(오른쪽)과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포로수용소인 하노이 힐튼(왼쪽)입니다.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 호아로 감옥이 있던 곳은 이전에 하노이의 오래된 마을이 있던 지역으로 베트남을 식민 통치하고 있었던 프랑스는 이 마을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감옥을 비롯한 건물들을 지었습니다.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 감옥의 이름인 호아로(Hỏa Lò)는 흔히 ‘불붙은 용광로’을 의미하기도 하고 ‘화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곳의 명칭은 호아로 거리(phố Hỏa Lò)라는 거리명에서 유래했으며,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이 거리에서 주전자, 찻주전자, 휴대용 난로 등 토기가 만들어지는 공장과 상점들이 몰려 있었습니다.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 현재 남아 있는 호아로 감옥의 사진과 안내도입니다. 호아로 감옥은 총면적 12,908 평방미터로 인도차이나에서 가장 크고 요새화 된 감옥 중 하나였는데 1993년 하노이 타워를 짓기 위해 감옥 대부분을 헐어 버렸으며 남아 있는 일부는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 프랑스 식민 시절 당시 호아로 감옥에 대한 전시물이 있는 방입니다. 호아로 감옥의 미니어처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호아로 감옥은 <뜨거운 용광로(fiery furnace)> 또는 <지옥의 구멍(hell hole)>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악명 높았던 곳으로, 주로 프랑스 식민 통치에 대항하여 베트남의 독립을 외치던 지도자들이 투옥되었습니다. 1913년 최대 수용 인원은 6백 명이었지만, 1916년 730명, 1922년 895명, 1933년 1,430명을 수용했고, 1954년에는 2천 명까지 수용하였습니다.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 1896년 푸칸(Phu Khan) 지역에 프랑스 식민 정부가 감옥을 지었을 때의 감옥의 모습입니다.  처음에는 감옥의 수용인원이 460명이었이만 개조 등을 통해 1954년에는 2천 명까지 수용하였습니다.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 호아로 감옥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그릇, 의복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수감자들은 인간 이하의 상태에 쳐해 있었고, 식민지 착취와 프랑스인들을 향한 베트남인들의 괴로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남성 수형자들,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 호아로 감옥에 수감되었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의 포로들의 수감 모습이 재현되어 있습니다. 모두 한쪽 다리에 강철 족쇄를 차고 있습니다. 수용소에 감금된 죄인들의 다리를 큰 쇠 자물쇠로 묶어, 수십 명 단위로 하나로 연결했습니다. 쇠 자물쇠로 인해 다리가 썩어 들어가고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방안에 설치된 작은 변기를 이용할 때에만 쇠 자물쇠에서 벋어났습니다. 수형자들은 열악한 환경을 견뎌내야 했는데 호아로 감옥의 생존자는 베트민(Viet Minh)의 핵심 멤버가 될 자격이 주어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46년 12월 19일부터 1954년 8월 1일까지 프랑스와 비엣민 간의 전쟁으로 프랑스-베트남 전쟁(the Franco-Vietminh War) 또는 베트남 독립 전쟁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대부분의 식민 국가들은 독립했지만 프랑스는 식민정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호찌민의 민족주의 저항세력은 프랑스를 상대로 8년 동안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렀는데 1954년 프랑스군이 라오스와의 국경 부분에 위치한 디엔비엔푸에서 크게 패퇴한 이후, 국제사회는 제네바 회담을 통해 새로운 선거에 의해 베트남 독립을 약속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북에는 호찌민을 대통령으로 하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수립되고, 남에는 바오 다이를 총리로 하는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졌습니다. 

 

지하 감방,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 호아로 감옥의 독방 감방은 교도소 규정을 위반한 최악의 수감자들을 위한 감방이었습니다. 이곳은 지옥의 지옥이었는데 어둡고 좁았으며 수감자들은 따로 구금되어 그 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배변을 해야 했습니다. 이곳에 갇힌 죄수들은 모두 부종이 있었고 공기와 빛의 부족으로 인한 피부질환이 동반되었습니다.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사회주의 경제 이론가인 쯔엉 찐(Trường Chinh, 1907년 2월 9일 ~ 1988년 9월 30일)은 1932년에 체포되어 이 독방 감방에 구금되었습니다.  

 

아몬드 나무,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 박물관 외부에는 건물과 담장 사이에 아몬드 나무가 있습니다. 이 아몬드 나무는 1930~1954년까지 감옥의 수감자들이 다양한 용도로 이용했습니다. 아몬드 잎은 설사병과 상처치료에 사용하였으며 아몬드 열매는 음식으로, 나뭇가지로는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호아로 감옥 수감자들의 가혹한 환경을 묘사하고 있는 청동 벽화,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 감옥 벽에 붙어 있는 수감자를 고문하고 있는 프랑스 간수들의 모습을 표현한 청동 벽화입니다. 프랑스 식민 지배하의 호아로 감옥 수감자들의 가혹한 환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호아로 감옥은 고문과 처형의 대상이 되는 베트남인 수감자, 독립정신에 찬동하는 정치범들을 수용했습니다. 감옥에서는 처음에는 프랑스인들의 손으로, 그 뒤에는 베트남인들의 손으로 죄수들에 대한 고문과 학대가 자행되었습니다.

 

수감자들이 탈출한 하수도,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감옥의 하수도를 통해 수감자들이 탈출하기도 했는데 1945년 3월에 100명이 감방의 쇠창살을 자르고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1951년 12월 24일에는 16명이 탈출을 시도해 5명이 성공했습니다. 특히 1945년에 탈출했던 사람들은 후에 베트남 독립운동에서 많은 활약을 했습니다. 탈출 당시 사용되었던 하수도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기념품점,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 호아로 감옥 박물관 중앙, 입구 앞에는 기념품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호아로 감옥과 관련된 상품은 없습니다. 베트남 문화와 관련된 물건들을 주로 판매하고 있는데 이곳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많이 구입할 것 같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기념품점과 비슷한 느낌이 많이 듭니다. 

 

감옥의 하수도를 통해 쇠창살을 자르고 수감자들이 탈출하는 모습,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감옥의 하수도를 통해 쇠창살을 자르고 수감자들이 탈출하는 모습을 재현했습니다. 공산당의 전 서기장(1991-1997년 역임) 도 므어이(Do Muoi, 1917년 2월 2일 ~ 2018년 10월 1일) 역시 예전에 수감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는 1945년 100명의 다른 재소자들과 더불어 하수도를 통해 탈옥했습니다. 도 므어이는 베트남의 개혁 개방 정책인 도이 머이를 이끈 지도자로 1995년 4월 11일부터 17일까지 한국에 방문하여 김영삼 대통령과 회담을 하는 등 경제협력을 도모했습니다. 2016년 네덜란드의 핏 더 용 전 총리가 사망함에 따라 "현존하는 세계 최장수 지도자"로 기록되었으며 2018년 10월 1일,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 있는 군 중앙병원에서 101세를 일기로 숨졌습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감옥 안에서 폭행, 고문, 살인은 다반사로 벌어졌습니다.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베트남 남동쪽 꼰다오섬에 식민지 감옥에서는 호랑이굴이라는 감옥을 운영했고 베트남전 당시 호아로 감옥에서도 미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이와 비슷한 고문을 했습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감옥 안에서 폭행, 고문, 살인은 다반사로 벌어졌습니다. 프랑스는 하노이의 호아로 감옥 이외에도 1861년 베트남 남동쪽 꼰다오섬에 식민지 감옥(Côn Đảo Prison)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에서 베트남의 독립투사들은 발에 족쇄가 채워진 채 구타와 고문에 시달렸습니다. 이 감옥에는 11개 옥사가 있었는데 이중 4번 옥사는 고문으로 유명했으며 호랑이굴로 알려졌습니다. 호랑이를 잡아 가두는 우리 구조와 조련하는 방식이 비슷한 데서 이름을 따 온 것인데 지붕이 없는 1.65평의 독방이 60개씩 두줄로 이어져 있었으며 간수들은 각 독방의 천장에서 긴 죽창으로 죄수들을 찔러대며 맹수 대신 인간을 길들였습니다. 호아로 감옥에서도 이와 비슷한 고문이 이어졌는데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식 호랑이굴이 생겼습니다. 1964년부터 북베트남 간수들은 프랑스에서 배운 고문 방식을 이용하여 미군 전쟁포로를 뙤약볕 아래 한 사람 정도 들어갈 크기의 철장에 가두고 창으로 찌르는 고문을 일삼았습니다. 

 

호아로 감옥 박물관의 4미터 높이의 단두대, 2017년 2월

호아이 감옥 박물관에는 베트남 독립운동가를 처형했던 4미터 높이의 단두대, 기요틴(Guillotine)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프랑스는 식민지 통치를 위해 두 개의 기요틴을 베트남으로 가지고 왔는데 그중 하나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프랑스혁명을 공포정치로 몰아간 기요틴(Guillotine)은 베트남 독립운동을 억압하는 상징으로 활용되었습니다. 

호아로 감옥 박물관의 단두대, 2017년 2월

단두대 위에는 핀으로 고정된 큰 칼날을 고정하는 2개의 철 기둥이 있습니다. 아래에는 사형수의 머리를 고정하기 위한 2개의 반원형이 있고, 시체가 들어 있는 등나무 상자 옆에는 사형수를 ​​넣을 수 있는 철제 서랍이 있습니다. 정확히 베트남에서 기요틴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얼마인지에 대한 통계도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손을 떼면서 관련 문서를 전부 불태워버렸기 때문입니다. 기요틴 처형으로 악명 높은 호아로 감옥은 1930년대 이후 베트남 독립운동의 전진기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고 호아로 감옥의 베트남인들은 함께 모여서 독립운동에 대한 체계적 논리와 현장감각을 익히게 됩니다.  

 

하노이 독살 계획의 실패로 단두대로 처형당한 베트남인 의행사 사진과 여성 수감자 사진,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날카로운 칼이 걸린 기요틴 바로 옆에는 하노이 독살 계획의 베트남인 희생자 사진이 전시돼 있습니다. 기요틴 처형은 베트남인 모두에게 공개한 오픈 이벤트식으로 실행되었습니다. 참수자의 머리를 보관하기 위해 엉성하게 만들어진 나무 바구니가 기요틴 바로 앞에 마련되었습니다. 또한 1930년~1945년 수감되었던 여성 수감자들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 하노이 독살 계획(Hanoi Poison Plot)은 1908년 초 호앙호아탐 (Hoàng Hoa Thám, 1858~1913년)과 판보이쩌우(Phan Boi Chau, 1867~1940년)를 중심으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들이 계획한 프랑스 주둔군 독살 계획입니다. 그들은 베트남인 요리사들과 함께 하노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식민지군들을 독살하고 무력화하고 호앙호아탐의 반란군이 하노이를 점령하기로 계획했습니다. 1908년 6월 27일 초 베트남인 요리사들은 프랑스 식민지군들을 암살하기 위해 독말풀이라는 독초가 들어간 음식을 준비했는데 프랑스 식민지군 200여 명을 기절시켰지만 살해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베트남인 요리사 1명이 죄책감으로 성당의 프랑스인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했으며 신부에서 보고를 받은 프랑스군 총사령관은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범인 색출을 시작했습니다. 이에 성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앙호아탐의 반란군은 모두 철수했습니다. 이후 이 계획에 참여한 베트남인 독립운동가, 베트남인 요리사 13명을 기요틴 처형을 받았습니다. 1908년 7월 8일에는 추가로 24명에게 사형을 집행했으며 나머지 계획 참가자들을 종신형, 추방형에 처해졌습니다. 많은 베트남인 독립운동가들은 꼰다오 섬 감옥에 투옥되었고 판보이쩌우는 일본으로 도주했습니다. 프랑스 식민지군은 1909년 1월부터 11월까지 호앙호아탐의 반란군과 11차례의 전투를 벌여 승리했으며 호앙호아탐은 1913년 타이응우옌에서 부하 중 프랑스 첩자에 의해 암살되었습니다. 


 

사형수들의 감방,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 사형수들이 외부와 소통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형수들의 감방은 호아로 교도소의 다른 감방들과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 이곳의 죄수들은 하루 종일 족쇄에 묶여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었고 감옥 문이 하루에 두 번만 열려 교도관이 수감자에게 식사와 물을 가져왔습니다. 교도소 규정에 따르면 사형 선고를 받은 수감자들은 형사 재판소에서 선고를 받은 날부터 최소 10개월 이상 이곳에 수감되었습니다. 죽음이 가깝게 다가왔지만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은 싸울 의지를 유지하며 책을 쓰고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 프랑스 식민 통치에 대항하여 베트남 혁명을 주도하다가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제단이 있습니다.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호아로 감옥은 북베트남이 공산화된 이후에 호아로 감옥은 공산혁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투옥하는 장소로 변모하였지만 베트남전이 벌어지자 미국과의 전쟁 시기였던 1964년부터 1973년에는 추락한 전투기에서 살아남은 미군 조종사들을 감금했던 곳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1964년 8월 2일 북베트남 해안에서 첩보 작전 중이던 미국의 구축함이 북베트남의 어뢰정에게 공격을 받은 통킹만 사건(후에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존슨이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알려짐) 이후 1964년 8월 7일부터 미군은 북베트남을 폭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폭격의 목표는  북베트남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북베트남의 방공망과 공업시설을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1965년 3월부터 1968년 11월까지 진행된 롤링 선더 적전으로 북베트남에는 일백만 톤에 달하는 폭탄과 미사일, 로켓이 퍼부어졌으며 베트남 전쟁 전체 기간에 미군이 사용한 폭탄은 모두 700 만 톤 정도입니다. 롤링 선더 적전뿐만 아니라 1972년 5월에서 10월까지의 라인배커 작전, 크리스마스 폭격으로 알려진 1972년 12월의 라인배커 2 작전에서 북베트남을 폭격하던 미군 조종사들 중 일부는 타고 있던 전투기가 격추되어 포로가 되었는데 호아로 감옥에 수용되었습니다.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미군 포로가 전쟁 때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전시물들입니다. 당시 미군 포로들이 사용한 침구, 생활도구 같은 것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미군 포로에게 제공된 각종 생활물품은 당시 베트남인들에게는 사치품에 해당되는 물건들입니다. 하지만 미군 포로 대부분은 호아로 감옥에서 열악한 식사와 비위생적인 환경 같은 비참한 상황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 베트남 당국이 미군 포로들에게 제공했던 의료혜택이나 여가활동, 만찬과 크리스마스 파티를 벌이는 미군 포로들의 모습의 사진들입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포로들에게 잘해주었다는 베트남의 주장과는 달리 간수들은 재소자들을 침대에 족쇄로 묶었으며, 제네바 협약을 어기고 고문과 학대를 가했습니다. 특히 창문 하나 없이 어둠 속에 가려진 작은 방에 가두어 정신적인 고문을 했습니다. 베트남 전쟁 중 호아로 감옥에 수용된 최초의 미국인은 1964년 8월 5일 총상을 입고 붙잡힌 에러벳 알바레즈 (Everett Alvarez Jr.) 중위였으며 호아로 수용소 단지는 미국 포로들에 의해 유명한 호텔 체인 힐튼 호텔을 조소적으로 참조한 <하노이 힐튼>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베트남 전쟁 당시 1965년 후반부터 미국 수감자들에 대한 고문이 심해졌는데 호찌민 사망 후인 1969년 10월부터 고문이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미군 포로를 수용하기 위한 감옥은 모두 13개가 운영되었는데  5개는 하노이에 있었고 나머지는 시 외곽에 있었습니다. 1973년 1월 27일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조약인 파리 평화 협정 체결 후 석방되었습니다.

 

 존 매케인 전 상원의원에 관한 부분은 하노이 힐튼 내 미군 포로 관련 전시관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입니다. 존 매케인이 입었던 전투기 조종복과 낙하산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존 매케인은 1967년 10월 26일 전폭기 A4-E를 타고 하노이 공습에 나서던 중 대공포 포탄에 의해 추락합니다. 그가 호수 위에 떨어졌을 때 물에 빠진 존 매케인을 향해 베트남인들이 뛰어들었는데 이때 사진이 촬영되어 그때 장면이 남아 있습니다. 탈출 당시 이미 부상을 입었던 존 매케인은 지상으로 옮겨진 뒤 베트남인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하면서 팔과 갈비뼈가 부러집니다. 이후 잘못된 수술과 고문의 후유증을 앓았지만 베트남 정부는 가혹행위는 없었고 대체로 이들을 잘 대우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포로로 잡혔을 당시 그는 관등성명만 밝히고 군사정보 등 나머지는 발성하지 않고 묵비권으로 일관했습니다. 또한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자신의 부친 잭 매케인에 대한 부분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틀 후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에서 존 매케인에 대해 보도가 되었으며 베트남군은 존 매케인을 미군 측에 포로가 된 베트남 고위간부와 교환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존 매케인 본인과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부친도 이를 거부했으며 파리평화협정 체결 후 포로 생활 5년 6개월 만인 1973년 5월, 다른 미군 포로들과 함께 귀환했습니다. 당시 목발을 짚은 채 닉슨과 악수를 하는 존 매케인의 모습은 미국인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정계에 입문한 존 매케인 의원은 베트남을 여러 차례 방문해 베트남과 미국의 관계 개선을 위해 적극 나섰습니다. 미국과 베트남의 수교 이전인 1985년 젊은 하원의원으로 처음 베트남을 방문했고, 최근에는 2016년까지 남아 있던 미국의 무역 제재 조치를 해제하는 협상을 주도했습니다. 그는 베트남전 참전 군인이자 고문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활동으로 베트남과 미국 간 화해의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전시실에는 2000년 4월 호아로 감옥 박물관에 가족과 함께 방문한 존 매케인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미국이 공산 베트남과 재수교에 들어간 것은 1995년으로 한국의 1992년보다 3년 늦습니다.

 

담장과 망루, 호아로 감옥 박물관, 2017년 2월

△ 호아로 감옥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은 높이 4 미터, 두께 0.5 미터로, 날카로운 병과 고압선으로 덮여 죄수들의 탈출을 막았습니다. 벽 안쪽에는 항상 경비와 순찰을 하는 3 미터 너비의 벽돌 도로가 있습니다. 감옥의 네 모퉁이에는 감옥 안팎의 모든 움직임을 가장 포괄적으로 볼 수 있는 4개의 망루가 있습니다.

 

하노이 힐튼(Hanoi Hilton)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하노이의 악명 높은 호아로 수용소에 억류된 미군 포로들의 경험에 초점을 맞춘 1987년 베트남 전쟁 영화입니다.